“근본적인 치료를 하지 않고, 번지르르한 겉옷만 입혀서 마치 환자가 아닌 것처럼 꾸미지만, (에너지 시장은) 사실 중증환자인 상태다.”
이유수 에너지경제연구원 본부장은 17일 서울 중구 LW컨벤션에서 열린 에너지(전력)시장 개편에 대한 공개 토론회에서 이같이 말했다. 이날 토론에 모인 전문가들은 한 목소리로 “독점체제를 깨고 시장을 자유화 할 정부의 의지가 중요한데, 정부가 이를 감행할지는 미지수”라면서 부정적인 의견을 냈다. 다만 판매 시장의 자유화를 통한 경쟁체제 도입, 신재생에너지·4차산업혁명에 따른 기술의 변화를 피할 수는 없을 것이라 진단했다.
◆ 시장 개방 안 되면 신산업 발전도 없다
소비자가 사용하는 전력 사용량과 패턴을 알 수 있다면 이에 맞춘 서비스도 더 많아질 수 있다. IoT, 빅데이터를 적용하면 새로운 시장과 서비스 창출이 가능해 소비자의 편의와 선택의 폭도 커진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이러한 서비스를 기대하기 난망하다. 한전(전력)과 가스공사(가스)가 유일한 에너지 판매처이기 때문이다.
석광훈 녹색연합 전문위원은 “일본은 이미 전력과 가스, 통신과 석유가 하나의 시장으로 통합돼 혁신 중”이라며 “스마트 미터 보급이 시급한데 이에 대한 실행은 더딘 상태”라고 말했다.
만일 판매 시장이 자유화돼 일본처럼 통신사업자가 전력시장에 뛰어든다면 새로운 경쟁체제가 형성될 가능성이 크다. 석 연구위원은 “BTM, 스마트 미터를 보급하기로 10년 넘게 논의됐는데 이러한 사항이 제대로 시행되지 않는 이유는 한전과 가스공사가 독점체제의 사업자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석 위원은 “한전 체제와 가스공사 체제를 빨리 무너뜨리고 신규사업자와 신기술이 들어오게 해야 하는데 쉽지 않다”고 말했다.
이유수 본부장은 “4차산업혁명 기술이 발달하고 있지만 전력 시장은 변화한 것이 없다”며 “시장 자유화를 통해 궁극적으로 지향할 것은 온실가스 감축과 새 산업을 육성하는 것”이라며 “기술 발전에 따라 제도가 바뀌고 있고 에너지 생산과 소비, 거래 형태도 바뀌는 만큼 이를 쫓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 본부장은 “앞으론 유틸리티(대형 발전사의 발전)에서 전력을 공급 받는 시스템을 벗어나 소규모 재생에너지 설비 등을 통해 생산과 거래가 일어날 것”이라며 “이미 외국에선 소매시장이 개방돼 전력회사가 아닌 통신사, 스타트업들이 사업을 하지만 국내 기업들은 틈새시장만을 노리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시장을 개방했을 때 공정한 경쟁 여건이 조성돼야 한다는 점도 지적됐다. 그는 “용도별 교차보조를 해소하고 전압별 요금체계로 가야한다”며 “공정경쟁 조성을 위해선 망 이용에 대한 공평한 이용 조건이 전제돼야 한다”고 말했다.
◆ 재생에너지 확대 대비할 때
전문가들은 재생에너지가 점차 확대되는 상황에서, 시장제도 개선이 없다면 재생에너지 확대 정책이 성공하기 어렵다는 점도 지적했다.
전영환 홍익대학교 교수는 “신재생에너지는 증가세에 있는 만큼 이와 관련한 출력 제한 보상제 등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재생에너지 3020 이행계획에 따르면 2030년 신재생발전원 목표 설비용량은 약 58.5GW다. 이중 51.2GW가 태양광과 풍력 설비로 간헐성이 큰 변동성 전원이 차지한다.
현재 재생에너지 출력 제한에 대한 보상 정책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재생에너지 3020 이행계획과 제8차 전력수급기본계획에 따라 재생에너지 보급이 늘어나면 과다한 출력을 조정해야하는 상황에 직면할 수 있다. 전 교수는 “우리나라도 조만간 출력 조정을 해야할 것”이라며 “지난해 11월 국내 전력계통에서도 덕 커브 현상이 발생한 만큼 관련 규정 마련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덕커브 현상이란 태양광 등 신재생에너지 발전 비중이 크게 증가한 지역에서 해가 떠있는 시간대 부하가 급격하게 감소하는 것이다. 이른 오전부터 재생에너지 발전만으로 전력수요 피크를 충족할 수 있기 때문에 보다 유연한 전력망 운영관리 시스템 적용이 필요하다.
재생에너지 변동성에 대응하기 위해 양수발전기, ESS 등 설비 확충을 할 것이 아니라 실시간 시장, 예비력 시장 등을 도입하는 것이 비용 효과적이라는 주장도 나왔다.
조강욱 전력거래소 시장계통개발 처장은 “시장제도를 개선하는 것이 수요예측·발전기 고장 같은 불확실성에 대응하는 방법이 된다”고 했다. 조 처장은 2011년 순환정전 이후 발전소를 더 지었던 것을 예로 들었다. 그는 “당시 기존 자원들도 유연성을 발휘할 수 있는 시장 가격 체계가 만들어졌더라면 굳이 유연성이 낮은 발전기를 확대 설치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라며 “가격 신호를 통해 기존 자원을 활용하고, 효율화할 수 있는 매커니즘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보조서비스에 대한 보상 등이 있다면 신규자원을 투자해 국가 전체적인 자원 낭비를 초래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김예지 기자